[우리집신문=ppp] 눈이 부시게 푸른 시월의 하늘을 보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시인 윤동주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도 등불 같은 시를 쓰며 부끄럼 없는 순수한 삶을 추구했지만, 독립운동 혐의로 수감됐다가 1945년 2월, 스물아홉의 짧은 생을 마쳤다. 광양 망덕포구에는 그토록 원했던 시집 출간에 실패하고 이역의 차가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윤동주의 유고를 지켜낸 정병욱 가옥(등록문화재 제341호)이 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은 윤동주가 손수 묶은 친필 유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광양 망덕포구의 가옥에 고이 간직했다가 광복 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다. 유고에는 서시를 비롯해 별 헤는 밤, 자화상, 길 등 시대의 어둠을 비추는 별과 같은 19편의 시가 또박또박 아로새겨져 있었다. 1948년 1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면서 마침내 시인으로 부활한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살아있다. 윤동주는 ‘쉽게 씌어진 시’에서도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반성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부끄러움의 사전적 의미는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한 마음’인데 광양에는 경술국치에 죽음을 결심하고 절명시를 쓰면서 부끄러움을 말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자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일컬어지는 매천 황현 선생이다. 1855년 광양 백운산 문덕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매천은 2,500여 수의 시를 남긴 문장가이자 47년간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한 역사가다. 매천 황현은 생원시에서 1등으로 합격했지만 부패한 관료사회에 개탄하며 대과를 포기하고 낙향해 예리한 통찰력으로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 역사적인 기록물을 남겼다. 일제의 강압적인 을사늑약 이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치욕스러워했던 매천은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이가 없음을 통탄하며 결연히 자결을 결심했다. 매천은 절명시 3수에서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구나’며 지식인의 고뇌와 책무를 일깨웠다. 이어 4수에서는 ‘마지막을 겨우 윤곡을 따르는 데에 그치니 때를 당하고도 진동을 따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노라’며, 참형을 당한 진동처럼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자결한 윤곡처럼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덕목으로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경술국치에 죽음으로 항거한 매천 황현과 독립운동 혐의로 희생된 윤동주는 붓과 펜으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며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끄트머리를 관통했다. 정구영 관광과장은 “윤동주의 생물학적 고향은 북간도지만 시인 윤동주의 고향은 그의 육필시고를 간직해 시인으로 부활시킨 광양이다”며, “광양 망덕포구에 가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끄러워했던 시인의 순결한 영혼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봉강 매천황현생가와 매천역사공원에는 자결로 저항한 매천 황현의 결기가 살아있다”며, “하늘이 유난히 푸른 10월에는 죽음으로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살아있는 두 분의 숨결과 정신을 찾는 광양여행을 계획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우리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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