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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한 수원의 독립영웅들

홍길동 기자 | 기사입력 2021/06/01 [08:36]

수원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한 수원의 독립영웅들

홍길동 기자 | 입력 : 2021/06/01 [08:36]

민족대표 48인 김세환(독립기념관 소장)


[우리집신문=홍길동 기자] 6월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호국보훈의 달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선인들의 피와 목숨 위에 세워진 것임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나이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진 고문에 굴하지 않고 독립과 구국의 투쟁에 앞장선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항일의지를 들불처럼 일으킨 독립운동가들

수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김세환(1989~1945, 독립장)이다. 김세환은 남수동 242번지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신학문을 배우고 다시 수원으로 돌아와 교직생활을 하며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특히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수원과 이천, 충남지역의 독립운동 조직 활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재판을 받으면서도 기개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고 알려졌다. 이후 수원에서 신간회, 수원체육회 등 사회단체 활동을 주도하며 민족주의 활동과 교육에 힘썼다. 해방 한 달여만인 1945년 9월 26일 숨을 거뒀다.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 동상이 세워진 임면수(1874~1930, 애국장)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다. 수원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며 수원지역 대표적인 근대학교인 삼일학교를 설립하는데도 힘을 보탰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신흥학교 설립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돼 평생을 고생하다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뿐만 아니라 김향화(1897~미상, 대통령표창)는 1919년 3월 29일 수원예기조합원 30여 명이 건강 검사를 받으러 가던 도중 일제가 화성행궁을 헐어 활용한 자혜의원과 일제경찰서 앞에서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의기를 떨쳤다.

◇독립운동가들의 고향, 산루리

지금은 없어진 이름 ‘산루리’는 독립운동가의 산실이었다. 수원화성의 팔달문 밖으로 팔달산 서남자락을 끼고 형성된 마을(현재 행정구역으로 교동과 중동, 영동 일부가 포함)에서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다수가 배출됐기 때문이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의 모진 고문으로 순국한 이선경(1902~1921, 애국장)이 대표적이다. 산루리에서 나고 자랐다. 1920년 서울 통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며 삼일여학교에서 매주 한 번씩 회합을 하던 이선경은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을 돕는다고 맹세했던 소녀다. 독립자금을 가지고 서울에서 상해로 출발하기 직전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혹독한 고문을 받다 8개월만에 석방됐으나 집으로 돌아온 9일 만에 순국했다.

이선경보다 한 살 많은 박선태(1901~1938, 애족장)도 산루리에서 태어났다. 독립을 위해 상해로 가려다 국내 항일투쟁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수원에서 독립의지를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구국민단을 조직해 활동을 주도했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에도 수원청년회 등에서 사회활동과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김장성(1913~1932, 애족장)은 산루리 378번지가 본적이다. 18세에 불과하던 1930년 10월 12일 화성학원 운동회에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16매에 달하는 격문을 만들어 북수리와 수원 읍내 10여 곳에 붙여 식민지 현실의 불평등을 알렸다. 동갑내기 친구 홍종근과 함께였다. 이 활동으로 체포돼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했다.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가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벌인 이병억(이유성, 1879~1973, 애족장)도 산루리가 고향이다. 노동이민을 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문맹 퇴치 운동과 자치 활동을 전개하다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이후 나성한인교민단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집해 송금하는 등 외교 활동 후원에 앞장서며 이승만의 활동과 정치노선을 후원했다.

조득렬(조안득, 1910~1961, 애국장)은 산루리 429번지에 본적지를 뒀다. 수원공립보통학교를 수료한 뒤 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일하며 노동조합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조선총독 우가키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폭탄을 제조해 비밀리에 성능시험까지 마친 뒤 암살계획을 꾸렸으나 무장경찰대의 급습으로 체포돼 징역 10년형을 받고 수감됐다가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차계영(1913~1946, 애족장)은 일본의 제국주에 반대를 외친 혁명가다. 남창리가 본적이지만 산루리에서 태어났다. 조선총독부의 급사로 취직해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독서회 산하에 적우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체포됐다.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경성제국대학 반제동맹 사건 등으로 3번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수원시가 발굴한 숨은 독립영웅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서훈을 받지 못한 산루리 출신 독립운동가도 다수다. 생몰 연대가 확인되지 않거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했어도 공적을 밝힐 자료가 충분치 않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후손이 없는 경우가 그렇다.

김노적(1895~1963)이 그 중 한 명이다. 산루리 332번지에서 태어난 김노적은 지금의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수원상업강습소를 졸업하고, 화성학원으로 이름을 바꾼 모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김세환의 제자였던 그는 1919년 김세환이 주도한 만세운동 인원 동원 책임자로 임명돼 3월 1일 방화수류정에서의 횃불시위를 주도했다. 이때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해 왼쪽 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됐다. 수원지역 사회운동에도 적극 관여해 신간회 수원지회 창립과 운영에도 힘을 보탰다. 1969년 삼일동지회에서 독립운동의 공로를 표창했지만, 구체적 자료가 부족해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선경의 언니인 이현경과 동생 이용성도 독립운동에 가담한 산루리 출신 인물이다. 이현경(1899~미상)은 성공회가 세운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경남에서 교원으로 생활하다가 1917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1년 3·1운동 2주기에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펼치다 검거됐다. 일본에서 한국 여성의 계급적·인습적 구속 및 민족적 압박의 철폐를 주장하는 삼월회 활동을 했다. 귀국 후 기자로 언론활동을 하다가 1928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현경과 이선경의 동생으로 ‘산루리 독립운동가 삼남매’의 막내인 이용성(1906~1974)은 개성 유학 후 수원으로 돌아와 수원체육회와 수원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김세환, 박선태 등과 함께 활동하며 수원의 사회단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수원시의회 초대 시의원에 당선돼 2대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 화성학원과 화성소년회, 수원소년동맹, 신간회 수원지회, 수원체육회 등에 참여하며 지역 언론운동을 주도하는 등 수원지역에서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우성규(1906~1941)도 산루리가 배출한 인물이다.

수원박물관은 ‘수원의 유관순’이라고 불리는 이선경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인 산루리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7월4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테마전 ‘수원 산루리의 독립영웅들’을 통해 그 숭고한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동근 수원박물관 학예사는 “기록과 후손이 파악되지 않고 묻혀 있는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기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며 “수원박물관의 전시와 교육 등 역사적 기록사업에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 수원지역 독립영웅들의 희생을 함께 기억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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